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떠이선 왕조 (문단 편집) === [[응우옌푹아인]]의 역공 === * 응우옌푹아인은 떠이선 정권이 중부로 물러나 경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서 일시적으로 응우옌씨 정권 시절의 일부 영토를 수복하기도 하지만 다시 떠이선 정권에 밀려서 도주하게 된다. '''(1차 시도)''' * 이후 시암 세력을 끌어들여 떠이선 군과 싸우게 하지만, 1785년 떠이선 군과 시암 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가 떠이선의 압승으로 끝나면서 실패한다. '''(2차 시도)''' * 이후 응우옌푹아인은 당시 선교활동을 위해 베트남에 있던 프랑스 아드랑의 주교인 피에르 피뇨 드 비엔((Pierre Pigneau de Behaine, 1741년 ~ 1799년)를 통하여 [[프랑스]]에 원군을 요청하게 된다. 응우옌푹아인의 부탁을 받아들인 아드랑 [[주교]]는 1787년 프랑스에 도착하여 [[루이 16세]]를 알현하고, 베르사유에서 대월과 프랑스의 공수 동맹 조약에 조인했다. 이 조약은 프랑스 국왕이 군대를 대월에 파견하여 도와주면, 대월은 다낭과 뿔로 꼰도르(지금의 꼰 다오)섬의 영유권 및 주권을 양도하고, 대월 전역에 대해서 프랑스가 상업권을 독점한다는 내용이었다. 그러나 이 조약은 원정군 편성을 위임받은 인도 주재 프랑스군 사령관이 원정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원정 자체를 취소하면서 실현되지 못하였다. '''(3차 시도)''' * 그러나 응우옌푹아인 못지 않게 근성인이었던 아드랑 주교는 포기하지 않고, 자기 힘으로 무기와 탄약을 구입하며, 대월 원정군을 조직하였다. 응우옌푹아인도 [[포르투갈]]과 [[영국]]에 원조를 청하는 한편, [[캄보디아]] 병력을 징병하여 기회를 노렸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